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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 논설위원
미국 이민당국의 한국인 노동자 300여명에 대한 체포·구금 사태는 이들의 ‘자진 출국’ 형식의 귀국으로 봉합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국민들은 미국의 투자 요구로 일하러 간 우리 노동자들의 몸과 손을 쇠사슬로 묶고 심지어 발에까지 쇠사슬을 채우는 야만스러운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두고두고 앙금으로 남을 만한 일이다.
이번 사태는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을 대미 투자사업에 놓인 허점과 덫을 바로잡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마가는 1960년대 민권 시대 이전으로 미국을 되돌리려는 백인·복음주의 세력의 반동이다. 핵심 지지층은 저소득·저학력 백인과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이다. 트럼프는 세계화 여파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양극화 심화, 그리고 이민자 급증으로 지위가 흔들린 이들 계층의 불안을 대변하며 이들의 분노를 기성 엘리트 집단과 ‘외부자들’(유색인종, 불법 이민자, 무슬림 등)에게 향하도록 선동했다.
마가는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적 백인인종주의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구호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백인을 더 위대하게’에 가깝다. 관세정책에서 유독 철강·알루미늄만 50% 관세율을 고집한 것도 이들 계층이 ‘러스트벨트’에 집중돼 있는 탓이다.
조지아주 현대차-엘지(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 대한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 노동자들을 쇠사슬로 결박해 호송하는 장면은 마치 18~19세기 아프리카 노예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국토안보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현장 단속”이라고 자랑하고, 이민세관단속국은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단속 영상을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버젓이 공개하기까지 했다.
극우 성향 백인들은 아마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공장 유치에 적극적이었던 조지아주 주지사와 지역구 의원 등 정치인들마저 태도를 돌변해 이들의 불만에 동조했다. 토착 미국인들의 반이민 정서를 외면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처럼 비이성적 광기가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 비자 문제는 동맹국이라면 사전에 언질을 줘 외교적으로 충분히 풀 수 있는 사안인데도 마치 잘 걸렸다는 듯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보여주기식으로 단속한 것은 정치적 활용 의도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의 ‘제조업 부흥’ 계획은 경제적 논리보다는 정치적 이해타산이 깊게 개입된 전략이다. 러스트벨트 백인 계층의 불만을 부추겨 집권에 성공한 트럼프로선 이들을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동기가 강하다. 정치 지도자가 제조업 부흥 정책을 추진해볼 수는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세계사적으로 그런 시도가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게 성공했다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는 대영제국이 왜 쇠퇴했겠는가.
사양산업은 시일이 지나면 후발국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 우리 같은 경우도 사양산업을 부흥시키기는 어려운데, 하물며 우리보다 생산비용이 최소 30%나 비싼데다 20년 이상의 제조업 공동화로 산업 생태계가 붕괴된 미국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트럼프는 제국의 위세를 내세워 완력으로 동맹국들을 동원해 이를 되돌려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떻게든 도와보겠다는 동맹국 노동자들을 마치 제국이 속국 노예 대하듯 하는 상황에서는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미국은 지금 제 발등을 찍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도 대미 투자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정권 교체기에 트럼프의 강압에 못 이겨 일본이 짜놓은 판을 따라 서둘러 ‘관세 합의’를 했으나 냉정하게 다시 살펴봐야 한다. 미국은 일본에 트럼프 임기 내에 5500억달러의 투자금을 집행하고, 트럼프가 지시하면 45일 내에 자금을 대야 하며, 수익금의 50~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는데,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준기축통화국인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을 따라 했다가는 우리 경제에 독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당장 위기를 모면해보겠다고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판별하고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제조업 부흥 계획이 실패해도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자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별 탈이 없겠지만 우리 경제는 큰 충격에 휘청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